- [성경본문] 요한복음2:13-25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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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5년 2월 16일 요 2:13-25,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은 두 번 있었습니다. 한번은 주님의 사역 초기에 있었는데 그것을 본문 요한복음 2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 말기에 한 번 더 성전을 정화하시는데 그 기록은 공관복음서에 나타납니다(마 21:12-13, 막 11:15-17, 눅 19:45-46).
공관복음에서는 성전 정화 사건을 각자의 복음서 후반부에 배치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이 사건을 책의 앞부분에 배치합니다. 이는 요한은 예수님이 참된 성전임을 강조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대신하시는 참된 성전이심을 드러내고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 사실을 밝히 드러내시기 위하여 성전 정화 사건을 복음서 앞부분에 배치하여 두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본문에서 유월절을 언급하는데 이를 유대인의 유월절이라고 굳이 말하는 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해를 돕기 위함입니다. 이방인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유월절이 유대인들의 절기 중 하나임을 밝히고 그것을 예수님이 완성하실 것임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신명기 16:16에 모든 유대인 남자는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을 지키러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해야만 한다고 규정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남자 성인은 1년에 세 번의 절기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예물을 드리며 예배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 유월절을 세 번 지내시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본문이고, 둘째는 6:4에 나오고, 세 번째는 11:55이후 입니다. 특히 유월절은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유대인의 최고 명절인 유월절이 다가오자 예루살렘은 예배자들과 순례객들로 시끌벅적하게 되었습니다. 성전 안 즉, 이방인의 뜰 안까지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고 또 여기에는 장사하는 사람들과 환전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소, 양, 비둘기 파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 양, 비둘기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먼 곳으로부터 오는 사람들의 편리를 위하여 매매하는 것이었습니다. 멀리서부터 이런 짐승을 끌고 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가장 큰 문제는 오다가 동물에 상처가 나면 하나님 앞에 드릴 재물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곳에 제사드릴 제물용 동물을 매매하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원래는 이런 제물들은 기드론 골짜기에서 팔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그것이 성전 이방인의 뜰까지 침범을 한 것입니다. 결국 편리를 위하여 했던 것이 이방인들이 기도하고 예배해야 할 장소로 사용하지 못함으로 영적 손해를 끼치고 만 것입니다.
여기의 돈 바꾸는 사람들은 이방인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이 가지고 온 로마 주화를 성전 세를 바치기 위하여 유대의 세겔로 바꾸어 주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당시 유대인이 성전세를 낼 때 로마 황제의 화상이 그려져 있는 주화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득불 돈을 환전해 주는 사람들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같이 짐승을 매매하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는 것입니다.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기고 환전을 해 주고 수수료를 챙기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이런 것을 허용해 주고 자릿세를 받아 챙기는 대제사장과 성전 관리자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같은 종합적인 일들을 근거로 주님이 이런 대처를 하셨습니다.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짐승을 쫓아내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가져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의분을 느낄 수 있지만 아울러 과격하지 않으신 자애를 엿볼 수 있습니다. 채찍을 만드시되 가죽이나 쇳조각을 단 채찍을 만들지 않으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분과 자애를 동시에 엿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짐승을 성전에서 내 쫓으셨지, 재물로 드리지 못하도록 짐승의 몸에 상처를 내지는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셨지만 그것을 뿌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돈을 뿌리셨다면 그 돈을 결코 찾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비둘기를 날려 버리지 않으시고 이것을 가져가라고 하셨습니다. 비둘기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드리는 값싼 제물이었는데 그런 제물까지 귀하게 취급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사람들의 소유물을 소중히 여기셨고 그들에게 의분 중에 자애를 베푸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주님이 이렇게 성전을 정화 시키셨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1)상인들이 폭리를 취하여 사람들에게 부정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했던 것입니다. 2)하나님의 성전이 이방인을 위한 예배의 장소로 제대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집이 ‘장사하는 집’으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의분을 가지고 그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심으로 하나님의 집을 깨끗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장면을 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제자들이 성경 말씀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시편 69:9입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공관복음서의 저자들은 이 때 이사야 56:7과 예레미야 7:11의 말씀을 인용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시편을 인용한 것입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성전에 대한 심판을 강조하지만 여기서는 고통받는 의인의 호소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튼 제자들이 주님의 이 모습을 보고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대단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유대인 제자들이 주님의 모습을 보고 구약 성경 말씀을 기억하여 그것을 연결 시킬 수 있었다는 것도 훌륭한 점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17)는 말씀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예배를 열망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성전 정화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열정과 예배의 회복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자들의 눈에도 주님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얼마나 열정적으로 원하고 계시는지를 보게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주님이 성전을 통한 예배 회복을 그렇게도 갈망하고 계셨다는 것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의 ‘삼키리라’는 말은 제물을 불 태우다라는 뜻인데 예수님은 옛 율법의 대표적인 제물인 소와 양은 성전에서 몰아내시고 그 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자신을 하늘의 불로 태워질 새로운 제물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드려질 진정한 제물은 소나 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구약 예언의 성취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스가랴 14:21의 예언입니다.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메시아가 도래하게 되면 하나님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인데 여기의 가나안 사람은 히브리어로 ‘상인’(잠 31:24)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전에 물건을 매매하는 상인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주님이 이 예언의 성취자로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심으로 정결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스가랴서의 말씀뿐만 아니라 말라기 3장에도 이런 예언이 나옵니다. “1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 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주님이 갑자기 성전에 임하셔서 그것들을 깨끗하게 하실 것에 대한 말라기의 예언인데 이 예언이 주님이 요한복음 2장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심으로 성취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구약에서 예언된 말씀의 성취 사건, 곧 성전 예배 회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예수님은 예배 회복을 위해 죽으셨고, 예수님은 예배 회복을 위해 분노하셨고, 예수님은 예배 회복을 위한 예언을 성취하셨던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18-20절에서는 주님이 성전 파괴와 재건축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는 이유는 선지자나 메시아는 표적을 보임으로 신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네가 이런 일을 하는 어떤 신적 권위를 보여달라고 한 것입니다. 어떤 권위있는 사람이 자기 건물에 들어와서 자기가 원치 않았던 물건들을 밖으로 던지며 내 건물에는 이런 것들을 두지 말라고 할 때 주위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뭔데 이런 일을 하느냐?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성전 청소 사건을 하나의 사법권의 행사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당신이 선지자나 예언자 정도는 되어야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지 않는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그 정도의 사람임을 표적으로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 한 번도 그 요구에 응하지 않으셨습니다. 단 요나의 표적만을 한 번 언급하셨을뿐입니다(마 12:38-39). 그러나 여기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언급하시면서 그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가 예수님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로 대체될 것을 암시하면서 성전 파괴와 재건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여기에 사용된 ‘성전’은 ‘나오스’인데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지성소와 성소가 있는 성전의 핵심 부분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14절에 나온 ‘성전’은 ‘히에론’인데 이는 성전 전체 구역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성전을 약간 다른 개념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19절의 성전은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와 죄용서가 있는 지성소를 자신과 동일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헐다’라는 단어는 ‘폭력적으로 파괴시키다’는 뜻이고 ‘일으키다’는 부활, 건물을 세우다는 뜻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고 다시 건축하는 것으로 오해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이 성전은 헤롯 성전인데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BC 19년에 선전 공사를 시작해서 AD 63년 완성하지만 7년 후인 AD 70년에 로마의 타이투스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이 때가 BC 19년부터 46년 동안 지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AD 27년이 되는 것입니다. 아직 완성도 되지 않은 이 성전 건물을 허물고 ‘네가 3일 만에 재건축 한다’고 하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는 메시아가 성전을 건축할 것을 미리 예언하고 계십니다. 스가랴 6:12입니다.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유대인들의 문헌에도 이런 내용들이 많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런 예언의 말씀들을 단순히 문자적인 의미로 이해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도 문자적으로만 이해를 해서 네가 이 건물을 허물고 3일만에 짓겠다는 것이냐로 물은 것입니다.
주님은 성전을 허물고 재건축하는 것을 너희들이 나를 죽여도 나는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19절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구절에서 성전을 허는 주체는 ‘너희’이고 일으키는 주체는 ‘내가’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주체는 유대인이고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게 하시는 주체는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도 그리스도는 3일 만에 다시 스스로 살아나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그들에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곧 성전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주님은 성전을 자기 육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육신 한 그의 몸이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헤롯의 성전을 바라보시면서 새로운 성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전은 그 기능을 다하였고 이제 새로운 성전을 통해 새로운 예배가 드려진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성전은 주로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성전은 하나님의 계시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2)성전은 하나님을 향한 제사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3)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결국 구약의 성전은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 그리고 백성들의 제사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이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찾아오시고 성전을 통하여 백성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그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성전의 3대 기능이 이제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된 것입니다. 1)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말씀하시고 계시하여 주십니다. 2)예수님을 통하여 백성들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3)예수님은 하나님이 임하시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예수님만이 참 성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을 수 있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주님이 부활하신 이후에야 그들이 성경과 주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의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서 전자의 성경은 시편 69:9을 말하고 후자는 19절의 말씀이라고 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을 받고 나서야 마침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성령님이 없이는 아무도 말씀을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깨닫지를 못하니 믿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성경과 주님의 말씀을 믿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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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23절부터 25절까지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은 것 같은데 예수님은 그들을 믿지 아니하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계시면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표적 외에도 더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는데 그 표적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의 이름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표적을 보고 믿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아쉽게도 본문의 많은 이들은 가짜로 믿은 것입니다. 진짜로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믿는 것처럼 한 것입니다. 가짜 신앙을 가졌습니다. 무엇을 보아서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 하며는 바로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의 ‘믿었다’는 이 말은 단순과거로 일회성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한 번 믿었지, 계속 믿은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연속성이 없이 그 때 한 번만 믿었지 그 다음에는 믿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믿음을 가짜 믿음, 단회적인 믿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반면에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아셨고 그래서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그들을 ‘의탁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은 미완료로 지속적인 내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저들을 아셨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계속하여 그들을 의탁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단회적으로 주님을 믿는 척 했지만 주님은 저들은 계속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들의 마음과 행동을 다 꿰뚫어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는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통하여서도 우리는 그분의 신성을 알 수 있고 또한 주님의 전지하심을 잘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는 참 성전이십니다. 구약의 성막과 성전에 대한 모든 기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육체로 다 이루셨습니다. 구약의 성전의 모든 기능도 이제 예수님으로 대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죄 용서를 받았듯이 우리는 성전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기도하고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이 들어주셨듯이 이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여 응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났듯이 이제 우리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성전의 기능들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다 이루셨고 지금도 여전히 중보기도 사역은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참 성전이 되신 그분은 인간들을 의지할 필요가 없으신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은 사람을 알 수 없지만 주님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행위까지 온전이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속담에 ‘물은 건너가 보아야 알고 사람은 지나 보아야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의 마음은 죽을 때까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직관적으로 알고 계시므로 그것에 따라서 합당하게 우리를 조치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우리의 필요와 앞길도 알고 계시는 분이시므로 당신의 백성들을 선하게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해 주실 분이십니다.
참 성전으로서 우리를 위한 유일한 중보자가 되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켜 주신 그리스도께서 개인과 가족들과 모든 성도들의 앞길과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실 것을 믿고 그리스도의 합당한 제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찬송/
기도 제목/ 참 성전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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